'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시간입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는 미주 한인사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긴 서재필에 관해서 알아보겠는데요. 오늘은 서재필 첫 번째 시간으로 갑신정변에 참여한 서재필이 미국으로 이주하는 과정을 알아보겠습니다. 김정우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서재필은 1864년 1월 7일 전라남도 보성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보성군 군수였고 서재필은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청년 서재필은 조선을 근대화하겠다는 일념으로 일본에 유학하기도 했는데요.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소장은 그가 개화파 쿠데타였던 갑신정변에 참가했다고 설명합니다.
[녹취: 김승태 소장] “서재필은 그의 나의 20세 때인 1884년 12월 급진개화파 관료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청나라 군대 개입으로 실패로 끝나자 잠시 일본에 피신했다가 1885년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미국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는 고학으로 영어를 공부하고 (존 웰스) 홀랜백의 도움으로 해리 힐맨 아카데미를 졸업하여 미국 망명 3년 만에 필립 제이슨이란 이름으로 미국 시민권을 얻었습니다.”
훗날 주로 미국에서 활동하는 서재필의 인생에서 이 갑신정변은 가장 중요한 사건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서재필은 훗날 갑신정변의 구체적인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1884년 12월 4일 한국 최초의 우정국이 서울에 개설되었고 정부의 모든 고위 관리들이 참석한 공식 연회로 축하하기로 하였다. 개화파는 그날이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할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일본에서 공부한 여러 명의 학생을 우정국 주변으로 보내 빈집에 불을 지르게 하였다. 동시에 여러 정의 권총을 발사함으로써 소요를 만들어냈다.
개화파들이 정변을 만들어낸 목적은 대략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 비상수단으로 민영익 이하 사대당의 거두를 제거하고, 청나라의 간섭을 끊고 독립국의 체면을 바로 잡을 것, 둘째 궁중의 요괴들을 소탕하고 민비의 정치 관여를 금단할 것, 셋째 국왕에게 요청하여 견실한 책임 내각을 조직할 것이었습니다.
당시 주동자 가운데 하나인 박영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낭독: 박영효] 대체로 목표는 이렇게 세웠으나 당시는 여론도 없고 정당도 없으며 병력도 없었다. 개혁을 단행하는 방법으로는 오직 사대당을 죽이고 국왕의 신변을 옹호하며 정령의 남발을 막는 외에 다른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희생을 무릅쓰고 비상수단을 쓸 결심을 했다.
비상수단으로 개화파는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서 쿠데타를 감행했습니다. 쿠데타 과정에서 개화파는 왕명으로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등 수구파 대신들을 처단했는데요. 이들은 5일 새로운 내각을 구성하였고, 6일에는 14개 조항에 달하는 개혁 정강을 발표했습니다.
[낭독: 14개조 개혁정강 1.] 대원군을 조속히 귀국시키고 청에 대한 조공허례를 폐지할 것.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정하여 재능에 따라 인재를 등용할 것.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리를 근절하고 궁민을 구제하여 국가재정을 충실하게 할 것. 내시부를 폐지하여 그중에 재능있는 자만을 등용할 것.
개화파들이 내세운 14개조 항은 이어 폐단 혁파를 위한 조항들이 계속 이어집니다.
[낭독: 14개조 개혁정강 2.] 그동안 국가에 해를 끼친 탐관오리 중에 심한 자를 처벌할 것. 각도의 환자미를 영구히 면제할 것. 규장각을 폐지할 것. 조속히 순사를 두어 도적을 방지할 것. 혜상공국을 혁파할 것. 그동안 유배 또는 금고된 죄인을 다시 조사하여 석방할 것.
이어 개화파가 내세운 개혁 정강은 정부 직능 개편을 언급합니다.
[낭독: 14개조 개혁정강 3.] 4영을 합하여 1영으로 하되 영중에서 장정을 선발하여 근위대를 조속히 설치하고 육군대장은 왕세자로 할 것. 일체의 국가재정은 호조에서 관할케 하고 그밖에 재무관청은 폐지할 것. 대신과 참찬은 날짜를 정하여 합문 내의 의정부에서 회의하고 정령을 의정-공포할 것. 정부-6조 외에 일체 불필요한 관청과 관리는 혁파하되, 대신-참찬으로 하여금 이를 심의하여 품계하도록 할 것.
14개 정강 안에는 청국에 대한 사대외교의 폐지, 봉건적 문벌제도 혁파, 탐관오리 숙청, 국가재정 일원화, 경찰-군사제도 정비, 책임내각제 등 당시 서재필이 뜻을 함께한 정변 주역들이 가진 근대적 개혁 의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개화파의 쿠데타는 삼일천하로 끝이 납니다.
조선 조정 수구파의 요청을 받은 청나라 군대가 개입했기 때문입니다.
12월 6일 오후 출동 요청을 받은 청군이 개화파가 왕을 호위하고 있던 창덕궁을 공격했습니다. 여기에 수비를 약속했던 일본군이 철수했고, 개화파 직계 100여 명의 군대가 힘써 저지했지만, 청군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에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정변 주역들은 일본군과 함께 인천으로 피신했습니다. 결국 서재필이 참여한 갑신정변은 이렇게 삼일천하로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훗날 서재필은 신한민보에 기고한 글에서 갑신정변이 실패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우리들이 실패한 근본 원인은 첫째 일반 민중의 성원이 박약하였던 것이고, 둘째 남에게 의지하려 하였던 것이다. 만약 한국 백성의 10%라도 개혁을 지원했다며 한국이 개혁되고 주권이 수호되었을 것이다.
서재필은 그러면서 정변 당시 일본에 의존하려 했었던 것도 실수였다고 자인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개혁파들은 민중의 지지를 확보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필사적으로 일본 정부의 지지를 얻고자 했다. 이것이 또다시 실책이었다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당시 다케조에 공사는 새로운 정부를 보호하기에 충분한 군대를 자신의 휘하에 두지 못했다. 둘째 한 외국인에게 그러한 부탁을 하는 것은 매우 현명하지 못했다. 설령 개혁 정부가 살아남았다고 할지라도 의심의 여지 없이 일본은 보수파 정권하에서 중국이 수행했을 재난과 같은 영향력을 그 공헌에 대한 대가로 요구했을 것이다.
이어 서재필은 일본의 본질에 대한 비교적 정확한 평가를 합니다.
[낭독: 서재필] 우리가 진보적이고 또 우리가 한국의 정치적 독립을 지향했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그들이 우리와 한 편이라는 것을 우리가 믿게끔 이끌었지만, 우리는 일본인들이 다른 민족체를 상대할 때 반드시 진실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정변에 실패한 김옥균과 박영효, 서광범, 그리고 서재필 등은 일본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이들을 태운 배는 1884년 12월 13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습니다. 서재필 일행은 우여곡절 끝에 도쿄에 도착했지만, 일본을 이들을 박대했습니다.
서재필은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낭독: 서재필] 우리가 몇 번 죽을 뻔하고 도쿄에 도착했을 때 우리 일행은 돈도 없고, 숙소도 없고, 친구도 없었다. 일본 사람들은 우리를 천대했고, 때로는 실제로 적대감을 가지고 대했다. 나는 몇 달 동안 일본에 있던 동안 겪었던 쓰라린 경험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때로는 이틀 동안 굶기도 했고 때로는 유숙할 곳이 없기도 했다. 요코하마에 있던 한두 사람의 미국인들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굶어 죽었거나 얼어 죽었을 것이다.
여기서 요코하마에 있던 미국인 한두 사람이 도와주었다는 것은 미국성서공회 일본 지부 총무로 그곳에서 활동하던 헨리 루미스와 한국에 선교사로 나가는 길에 잠시 일본에 머물며 준비하던 미국 선교사들이었습니다.
특히 루미스는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서재필 일행을 반가이 맞아주고 도움을 주었습니다.
한편 루미스와 김옥균과의 특별한 인연으로 서재필은 루미스 집에 들어가 그에게 한국말을 가르쳐주고 그로부터 영어를 배웠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일본에서 그런 식으로 숨어지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재필은 서광범과 의논하여 미국으로 가서 공부를 더 하기로 하고 이를 동지들에게 알렸습니다.
이에 박영효도 같이 가겠다고 나섰지만, 김옥균은 일본에 남기로 했습니다.
이들은 이 무렵부터 여비를 마련하고 루미스와 선교사들로부터 소개장을 받아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서재필 일행은 마침내 미국행 배를 탔습니다.
'인물로 돌아보는 미주 한인사', 오늘은 '서재필' 첫 번째 시간으로 갑신정변에 참여한 서재필이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는 과정에 관해 알아봤습니다. 지금까지 김정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