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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풍경] 위안부 피해자 다큐멘터리 미 대학가 상영회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김복동' 포스터. 출처: 뉴스타파.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김복동' 포스터. 출처: 뉴스타파.

매주 금요일 북한관련 화제성 소식을 전해 드리는 `뉴스 풍경'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 성노예 피해자였던 한국인 고 김복동 할머니의 삶을 담은 영화가 미국 내 대학에서 상영되고 있습니다. 장양희 기자 입니다.

한국의 일제강점기 시절인 1926년 봄,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난 김복동 할머니.

김복동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가 되는 과정은 여느 위안부 피해자들과 마찬가지입니다.

일자리를 준다는 말을 믿고 고향을 떠났고 같은 기대로 온 많은 소녀들과 위안소로 끌려갑니다. 1940년 일본군 위안부가 된 소녀 김복동은 8년 후 만신창이가 되어 22 세의 나이로 고향에 돌아갑니다.

치욕스러운 과거를 숨기고 살았던 김 할머니는 1992년 3월, 침묵을 깨고 세상에 나왔습니다.

영화 제목이기도 한 ‘내 이름은 김복동입니다.”는 김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로서의 삶을 세상에 알리는 첫마디 였습니다.

지난 17일, 미국내 민간단체 워싱턴정신대대책문제협의회와 조지메이슨대학교 학국학 센터 주관으로 열린 “내 이름은 김복동입니다”영화 상영회.

1992년부터 올해 1월 향년 92세로 숨을 거두기까지의 삶을 담은 이 영화는 27년 전 할머니의 목소리로 시작합니다.

[영화녹취: 김복동 할머니] “관둥, 몸검사를 하는데..”

씻은 손을 씻고 또 씻고, 단정하게 빗질한 머리를 손으로 여러 번 다시 정돈하는 할머니.

[영화녹취: 김복동 할머니] “머리는 제대로 빗겨 졌나?”

화려하지 않은 장신구를 거는 주인공 김복동 할머니는 말 한마디, 얼굴 표정, 옷자락 하나에서도 흐트러짐이 없습니다.

스스로 침묵을 깨지 않았다면 누구도 몰랐을 치욕의 시간.

[영화녹취: 김복동 할머니] ”자식도 없이 혼자서...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그러나 중국 광둥, 홍콩,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등지에서 위안부로 경험했던 일들을 국제사회에 증언하기 시작했습니다.

영화는 이후 일본에서 우익단체들의 거친 욕설과 모욕적인 상황을 경험하는 피해자들을 소개하며 증언 후 그들의 삶은 더 외로웠다고 말합니다.

1998년 고향으로 돌아가는 김복동 할머니. 고향으로 돌아간 김 할머니의 당시 모습은 여동생의 회고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2000년 일본군성노예 전범여성국제법정에 원고로서 문서로 증언한 할머니는 다시 침묵하게 됩니다.

그리고 10년 후 다시 일어난 김복동 할머니. 2010년 85세가 되어 돌아온 곳은 1992년 이후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열리고 있는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는 수요집회’였습니다.

그리고 2012년 아베 신조 일본 내각 부활로 김 할머니는 피해자들의 인권 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펼칩니다.

“창녀는 나가라”라고 외치는 일본 극우 성향 시민의 시위대 앞에서 그리고 “일본의 한국인 위안부 강제동원의 증거가 없다”라고 말하는 오사카 시장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는 김 할머니.

[영화녹취: 김복동 할머니] ”증거가 없다는게 말이 됩니까? 그러니까 만나고 가야되요. 망발을 하고 뒷감당을 못하는데, 그러니까 앞으로 그런 망발을 하지 말라고."

영화 “내 이름은 김복동입니다.”는 한국의 시민사회가 김 할머니와 피해자들의 활동에 어떤 영향을 받는지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의 쟁점으로 떠올랐던 ‘위안부 소녀상’이 탄생한 배경과 과정을 소개하는데요, 소녀상은 한국사회와 해외 한인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인 여학생들의 참여 장면, 특히 한일 합의 무효를 주장하며 눈물로 시위를 벌이다 한국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 체포되는 장면에 관객은 동요했습니다.

[영화녹취: 한국 여학생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고통을 멈추고 진정한... 대학생들은 너무나 한심하다!"]

영화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상처 치유와 인권 회복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 정부의 진심 어린 사과를 외쳤던 김복동 할머니의 한결같은 소망을 담으며 끝납니다.

100여 명의 관객들은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질의응답 시간에도 자리를 지키며 의견을 내놨는데요, 위안부 역사에 대해 배운 적 없다는 미국인 여학생들이 일어나 다른 소감을 밝혔습니다.

[녹취: 미국인 여학생] “My grandfather was in world war two, and witnessed atrocities committed against the jews and..”

할아버지가 2차 세계대전에서 싸웠고 당시 유대인 학살사건 등 잔혹한 전쟁범죄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는 이야기인데요, 이런 사실들은 자신에게 외교관의 꿈을 갖게 했다며 위안부 영화가 큰 의미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자신을 원주민 자녀라고 소개하는 여학생은 미국의 인디언들도 학살의 역사가 있다며 위안부들의 이야기는 자신에게 감동을 준다고 말했습니다.

영화를 소개한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의 문제가 아닌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범죄 피해자들의 문제라는 점도 분명히 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가 우간다와 콩고 등지에서 만난 피해자 여성들이 보내온 동영상 메시지를 소개한 윤 대표는 내전 국가들의 성폭력범죄 피해자 여성들이 김 할머니와의 인연으로 현재 피해자들을 대변하는 활동을 벌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주요 활동으로는 1992년 8월 제1차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아시아연대회의, 유엔 인권위원회 1993년 6월 오스트리아 비엔나 세계인권대회, 그리고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의 증언대에 선 일 등입니다.

2012년에는 전쟁 중 성폭력을 경험한 여성들을 위한 기부 모금인 ‘나비기금’을 발족하기도 했습니다.

미국, 일본, 베트남, 독일 등 전쟁 피해를 입은 나라를 중심으로 각지를 돌며 피해 사실을 알렸던 김 할머니는 평소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일본계 한국인 학생들에 각별한 애정을 가졌고 기금을 전달했습니다.

국제사회는 이런 김 할머니의 활동에 주목했는데요, 2015년 `AFP 통신'은 김 할머니를 ‘자유를 위해 싸우는 영웅’으로 선정했고, 미국 캘리포니아 글렌데일 시는 ‘용기 있는 여성상’을 수여했습니다.

지난 1월 김 할머니가 숨진 직후 뉴욕타임스'와 `NPR,' `블룸버그' 통신 등 미 주요 언론들은 김 할머니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운동가’로 소개하며 사망 소식을 전했습니다

한편 이 영화는 ‘김복동’이라는 제목으로 지난 8월부터 한국 내 130여 개 개봉관에서 9만여 관객을 만났습니다.

윤미향 대표는 위안부 관련 다큐 영화가 개봉관에서 호응을 받은 적은 없었다며 그 이유를 현재 한일 간 갈등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대중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으로 봤습니다.

윤 대표는 미주 상영회에 대해 고인의 생전 미국 내 활동 때문이라고 밝히며 김복동 할머니가 던졌던 메시지를 상기시켰습니다.

[녹취: 윤미향] “김복동 할머니가 미국 사회에 왔을 때마다 미국사회에 던졌던 메시지는 ‘이건 한국의 문제가 아니 예요, 이건 우리들 만의 문제가 아니에요.당신들의 아이들, 또 만약 전쟁이 나면 우리들 같은 피해를 입을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겼었거든요. ...”

상영회는 다음 달 까지 시카고 일리노이,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텍사스 휴스턴, 매사츄세츠 보스턴 등 10여 개 대학교에서 열립니다.

VOA 뉴스 장양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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